Lee Dong Soon

그 이전까지 그림에서 색채는 형태를 보완하거나 돋보이게 하는 종속적 요소에 불과했다.

색채 자체가 표현의 목적이 된 것은 색채의 밀도를 발견하면서 부터였고, 그 밀도가 인간의 감성과 결합하면서 색채는 완벽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래서 칸딘스키는, 색채는 건반이며 작가는 그림을 통해 피아노 선처럼 이어진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색채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색채는 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감성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에 호소하는 형태와 달리 색채에 대한 감흥은 본능적이고도 즉각적이다.

이동순의 그림도 감성의 울림으로 먼저 다가온다. 푸른색이 주조가 된 화면은 그 무엇을 표상한다는 인식이 전에 색채자체의 감각적 떨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특징적인 양상은 색채가 단순히 구성적 조화나 대비적 효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색의 미세한 밀도와 층차層差가 감성적으로 일체화 된 화면을 만든다는 점이다.

푸른색은 유리 구슬처럼 투명하고 심연처럼 깊은 색깔이다. 바다와 창공의 빛깔이 시시각각 변화하듯이, 푸른색은 색의 층위에 따라 부드럽고 다채로운 화음을 부르는 색깔이기도 하다. 사실 푸른색에 대한 작가의 정감과 애착은 각별한

것이였다. 작가의 말처럼, 푸른색은 절제의 색깔로서, 적은 색채로도 무한히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색채이다. 작가에게 푸른색은 “때론 떠나고 싶어도,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결국은 끝내 떠나지 못했던 색깔이다.”

사실 푸른색 만큼 인간의 감성을 다채롭게 일깨워 준 색깔은 없다. 푸른색은 성모의 성의에서 보듯이 태초와 궁극을 함께 포괄하는 신성을 상징하기도 했고, 이브 클랭의 청색 모노크롬에서는 비非 물질성과 형이상학적 초월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또 고흐의 푸른 밤 하늘에서 푸른색은 우수와 슬픔을, 샤갈의 그림에서는 꿈과 환상을 은유 하기도 했고, 피카소의 청색시대에 등장하는 군상들처럼 그것은 존재의 무거움과 삶의 불가사의를 상징하기도 했다.

색채가 표현의 근본요소가 될 때, 그림에서의 감동 르네위그에 의하면, 색채는 빛과 결합하면서 정신성을 획득했고, 종교적

상징 체계에 의해서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색의 특성과 주제 사이의 정신적 일치’에서 온다.

 이동순의 작품에서 푸른색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만든 색깔이고 맑고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빛깔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행복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단순한 향수를 넘어, 부조리하고

오탁한 현실에 대한 부정을 지워 버릴 수 있는 바램의 색깔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화면구성은 아이들의 심성처럼 단순하고 소박하다. 기교가 배제된 화면의 기본구도는 어린 시절 맨땅에 금을 그어 놀던 ‘시차기 놀이’나 종이딱지의 모양, 그리고 어릴 적 매일 접하던 밥상 보의 문양들에서 채용한 것이다.

 네모와 세모, 원이라는 기본형으로 이루어진 그 순수한 도형들은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기억의 원형 같은 것이다.

그 위로 낙서처럼 희미한 형상들이 보인다. 천진난만한 그 형상들은 목소리를 높이거나 보는 이에게 긴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 단순한 구성과 천진한 형상이 보는 이를 슬그머니 미소 짓게 하고, 뒤돌아서면 맑은 울림과 여운을 전해준다. 아이들의 모습, 물고기와 새, 하늘과 별자리, 상자 같은 건물들과 숫자들, 벌레들과 나무들, 그 그림일기처럼 소박한 모습들은 희미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프로필들이고, 그 세상은 우리 모두가 꿈꿀 수는 있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의 풍경들이다.


 이동순은 다작多作을 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철저하게 또 지속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변화의 욕구는 작품 개념상의 변화보다 매체에 대한 탐구로 이어져, 작가는 바탕과 마티에르의 재 질감에 대한 실험과 탐구를 끊임없이 계속해 왔다.

 작가는 90년대 초반 〈기억〉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캔버스에서 완전히 탈피한다.

 캔버스 대신 도입된 재료가 한지와 닥종이였다. 작가는 가족들이 오랫동안 사용하던 베개나 이불 ‘호청’의 천 조각을 그림의 바탕으로 도입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변형캔버스를 사용하여 평면을 분리함으로써 작품에 공간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작가가 사각의 캔버스에서 탈피한 것은 각진 프레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캔버스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설정된 개념이자 양식 이전에 이미 규정되어 버린 일종의  ‘틀’이다.

  서구 미술에서는 그 기본구조를 회화의 근본요소로 존중했지만, 그것은 어차피 안으로 닫혀진 개념이고 밖으로부터 격리된 세계일 수 밖에 없다. 작가가 천이나 한지를 그림의 바탕으로 즐겨 사용한 것은, 자신의 기억이 묻어나는 매체였기 때문이기 도하지만, 그 재료의 속성이 지닌 개방성과 유동성 때문이었다.

천이나 한지는 닫혀진 경계를 만들지 않는다.

네모꼴을 형성하더라도 그 윤곽은 항상 작품의 내부와 외부가 상호작용하고 침투되는 접선을 만든다. 작가가 푸른 화면의 가장자리에 밝게 터지 는듯한 원색을 어렴풋이 가미하는 것도 열린 세상에 대 한기대 때문이다.

 세상과 행복하게 하나가 되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림 바깥의 세상으로 확산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회복의 열망은 때때로 과거로의 회귀욕구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완곡하게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가령 합리주의와 소비문화의 상징물로서의 외국 잡지를 접어 딱지를 만들어 붙이고, 그 잡지의 내용을 하나하나 색채로 지워가는 작업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불화 내지 동질성 찾기의 지난함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이동순의 그림들은 사람을 고혹적으로 흡입하는 자장은 없지만, 무기교의 순수함으로 우리에게 감동과 위안을 준다.

그 맑고 아름다운 그림들은,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무너뜨린 정원이고 잃어버린 동산인지 모른다.

 소박함과 천진난만함이 가득 찬 그 그림들이 현실과 유리된 피안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러나 세상사에 부대 끼며 잊고 지낼 수 밖에 없었던 동심과 순수의 세계이다.

결국 산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조금씩 지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동순의 그림들은 더욱 긴 여운과 울림을 준다. 우리 모두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이다 

                                                                                             

                                                                                                                      故 이동석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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